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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사상과 일체유심조,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의 위대한 깨우침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7.

 

원효 대사 동상

기본 정보

이름: 원효(元曉) - 설(薛)씨
생몰: 617년 ~ 686년
국적: 신라
직업: 승려, 불교 사상가, 학자
한 줄 요약: 일심과 화쟁사상으로 대립하는 불교 종파들을 통합하고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신라의 대학승

별이 떨어진 밤, 밤나무 아래의 탄생

617년, 신라 진평왕 39년. 경상북도 경산의 압량군 불지촌 율곡, 한 그루 밤나무 아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조씨는 임신 중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산달이 가까워진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만큼 급하게 아기가 태어나려 하자,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원효였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밤나무의 열매는 평소보다 월등히 컸다고 전해지는데, 마치 이 아이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 아버지는 나마 관등을 지낸 담날로, 진골은 아니었지만 6두품에 해당하는 지배층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했던 원효는 어릴 때 이름을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라 불렸는데, 우리말로는 '새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깨어난 진리 탐구의 의지

원효가 성장하던 7세기는 삼국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던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원효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5세 무렵, 어머니 조씨의 죽음을 경험한 그는 더욱 깊은 실존적 고뇌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모든 재산을 뒤로 하고 집을 나와 승려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특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황룡사에 들어가 홀로 불교 경전들을 탐독하며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혜숙, 혜공, 대안, 낭지 등 당시 유명한 신라 승려들과 교류하며 대승불교적 성향을 키워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무덤에서 얻은 깨달음, '일체유심조'

더 깊은 불법을 배우고자 원효는 650년과 661년 두 차례에 걸쳐 8살 연하의 동료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습니다. 첫 번째는 요동에서 고구려군에 잡혀 돌아와야 했고, 두 번째 여행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하게 된 두 사람.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손으로 떠마신 물이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던 순간, 원효는 번개처럼 깨달았습니다.

"똑같은 물이었는데 어제 밤에는 그렇게 달콤했다가 아침에는 이토록 역겨울 수 있다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구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깨달음으로 그는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파계의 선택, 요석공주와의 인연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원효는 형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요석궁에 있던 공주와 함께 살며 아이를 낳은 것은 승려로서는 명백한 파계였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훗날 이두를 정리하고 발전시킨 신라의 대학자 설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원효에게 이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승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며, 불교의 깊은 이치를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율의 형식보다는 불법의 본질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백성과 함께 춤추며 전한 부처의 가르침

원효는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커다란 박을 보고 그 모양을 본떠 무덤박(無碍)이라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들고 거리로 나가 춤추고 노래하며 백성들 사이로 파고들어갔습니다. 그가 부른 무애가는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어려운 불교 교리를 쉽고 친근한 노래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사람이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그를 허물없이 따랐고, 그들은 원효의 가르침을 통해 가슴 절절히 와닿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화쟁사상, 대립을 화합으로 이끄는 지혜

원효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격렬하게 대립하던 불교 종파들을 조화롭게 통합한 화쟁사상입니다. 7세기 동아시아 불교계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가 '공(空)'과 '유(有)', '진(眞)'과 '속(俗)'의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에서 이러한 대립이 결국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임을 논증했습니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서로 다르게 보이는 불교 이론들도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화쟁은 화와 쟁을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것들의 근원을 꿰뚫어보아 이들이 불이(不二)임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타협이 아닌, 더 높은 차원에서의 통합을 의미했습니다.

일심사상, 모든 것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효 사상의 또 다른 핵심은 일심(一心)사상입니다.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그는 인간의 마음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일심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상대적인 구분을 벗어난 절대적인 무엇이며,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기에 억지로 이름을 붙여 '일심'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일심은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가 곧 불국토이자 극락이었습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만행귀진(萬行歸眞)을 믿고 실천한 그의 사상은 단순히 학문적 체계를 넘어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100부 240권, 동아시아를 감동시킨 학문적 업적

원효는 평생에 걸쳐 100여 부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기신론소』는 중국의 법장, 종밀과 함께 '3대 기신론 주석서'로 평가받으며, 법장의 주석서조차 원효의 것을 상당 부분 따랐을 정도였습니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 진나의 제자가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의 후계인가?"라고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는 일화는 그의 학문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중국의 학승들도 현장삼장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 원효의 논증을 접하고는 동방을 향해 3번 절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저서는 멀리 중앙아시아 돈황에서까지 발견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습니다.

혈사에서의 마지막 여정

보살행으로 민중 교화를 마친 원효는 만년에 다시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 성사로 돌아갔습니다. 686년 3월 30일, 그는 혈사(지금의 경주 골굴사)에서 70년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아들 설총은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 금당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이룬 일들에 대해 평온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전하고, 분열된 종파들을 화합으로 이끌며,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첫 새벽을 연 사상가의 영원한 유산

원효라는 이름 자체가 '첫 새벽'을 의미하듯, 그는 한국 불교사에 새로운 아침을 열었습니다. 그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갈등 해결과 사회 통합의 지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원효로, 원효대교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이룬 '다리 놓기'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종파 간의 다리, 학자와 민중 사이의 다리, 삼국 간의 마음의 다리를 놓은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원효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만나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원한 등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의 경지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유롭고 포용적인 삶의 모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