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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일승법계도로 신라 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의상"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8.

 

 

의상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의상(義湘)
생몰: 625년 ~ 702년
국적: 신라
직업: 승려, 화엄종 시조, 철학자
한 줄 요약: 화엄일승법계도를 통해 동아시아에 화엄 사상을 체계화하고 해동 화엄종을 개창한 신라 최고의 고승

진골 가문에서 피어난 구도의 꿈

625년, 신라 왕경의 진골 귀족 김한신의 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의상은 당시 최고 신분층인 진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세속의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아닌, 불법의 진리를 향해 있었습니다. 19살에 왕경에 있던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기록은, 이미 젊은 나이에 세상을 초월한 깨달음의 길을 선택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 진골 귀족의 아들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지만, 의상에게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우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효와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결별

의상의 청년 시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원효입니다. 한동안 8살 연상으로 그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원효와 함께 공부했으며,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를 넘어선 깊은 법우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함께 불법을 구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두 사람은 26살이던 650년에 육로를 통한 1차 유학을 시도했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오해받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661년에 재차 유학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는 유명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낸 원효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발길을 돌린 반면, 의상은 초지일관의 마음으로 홀로 당나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 순간이 두 고승의 서로 다른 불교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선묘라는 이름의 순수한 사랑

661년, 마침내 당나라 땅을 밟은 의상은 양주에 당도한 의상은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 수위장 유지인의 집에 머무르며 병을 치료했는데, 그 집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선묘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처녀가 이국에서 온 고결한 승려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지만,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의상에게 선묘의 사랑은 분명 마음을 흔드는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흔들림 없이 매진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냉정함이 아니라, 더 큰 사랑 -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을 향한 의지였을 것입니다.

지엄 문하에서 꽃핀 화엄의 꽃

의상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을 뒤로하고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 교학의 기초를 다진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에게 8년 동안 화엄 사상을 배웠다고 합니다. 지엄은 당시 화엄학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그의 문하에는 훗날 중국 화엄종 제3조가 되는 법장도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엄 밑에서 동문수학한 법장과는 신라에 돌아온 뒤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의상이 단순한 유학생이 아닌 당대 최고 수준의 학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668년에는 화엄 교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지엄에게 인정받았다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화엄 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글 210자를 54각이 있는 도인에 합쳐서 만든 것인 이 작품은, 방대한 화엄경의 사상을 시각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철학서였습니다.

조국을 향한 험난한 귀로, 그리고 선묘의 마지막 사랑

670년에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왔다는 의상의 귀국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고국에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전승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와 당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의 귀국을 재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학문적 성취도 중요했지만, 조국의 위기 앞에서 의상은 한 명의 신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귀국길에서 벌어진 선묘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야말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선묘는 의상의 귀국 선물로 법의를 준비해 두었는데 집에 돌아와 의상이 떠난 사실을 알고 선물을 들고 의상의 뒤를 쫓았다고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였습니다. 선묘는 다시 "이 몸이 용이 되어 의상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하면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는 장면은, 순수한 사랑이 어떻게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부석사와 화엄 10찰의 창건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봉황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석사라는 이름 자체가 선묘와의 인연을 담고 있습니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세 차례를 하였더니 무리가 겁을 먹고 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건립한 사찰이 부석사라는 창건 설화는, 의상이 선묘의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의상은 이후 전국에 화엄 10찰을 필두로 많은 절을 창건하여 불교의 융성을 가져왔다며, 의상 문하에서 3,000명이 넘는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전하는데, 제자 중에는 뛰어난 고승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10대 제자로 칭해지는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이 유명하다며, 이들을 통해 화엄종은 신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78년의 삶을 마감하며 남긴 영원한 유산

702년 의상은 78세를 일기로 열반했다고 하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과 화엄 교학을 논하며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692년에 현수는 승전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는 기록은, 죽음을 앞두고도 학문적 교류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려 숙종은 그에게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라 시호하였다며, 이는 그가 단순히 한 승려를 넘어 한국 불교사에 미친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화엄의 꽃, 오늘에 이르는 메시지

의상이 남긴 것은 단순한 종교적 유산을 넘어섭니다. 개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중층적으로 개체간의 융합을 지향하는 특색을 가진 그의 화엄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우리나라 불교 최초의 종파로 화엄종을 자리 잡게 하였기 때문에, 해동화엄초조로 추앙받는다는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단순히 중국 불교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 토양에 맞는 독창적인 불교 철학을 창조했습니다. 선묘의 순수한 사랑을 기억하며 부석사를 창건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지혜란 냉철한 이성만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의상이 보여준 것은 학문과 실천, 개인적 수행과 사회적 교화,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융합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가고 또 가도 본래의 자리이고, 이르고 또 이르러도 떠난 자리로다"
- 의상, 화엄일승법계도 중에서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의 이 말처럼, 진정한 깨달음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그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