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정보
운명을 가른 어린 시절의 선택
1864년 전라남도 보성의 외가에서 태어난 서재필.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일곱 살 때 내린 한 가지 결정이었습니다. 양부모의 부름에 따라 충청도로 보내진 후, 다시 서울에 있는 외삼촌 김성근의 집으로 향한 것이죠. 이 작은 발걸음이 그를 근대 조선의 개화운동 중심부로 이끌었습니다.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된 그는 이곳에서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운명이 준비한 만남처럼, 이들과의 교류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비극
1884년 12월 4일, 20세의 청년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조선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꿈을 품고 갑신정변에 나섰습니다. 그는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며 신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꿈은 단 3일 만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그는 역적이 되었고, 더 비극적인 것은 그 댓가였습니다.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고, 두 살 된 어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으며, 동생 재창은 체포되어 참형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꿈이 가족 전체의 목숨으로 치러진 것입니다.
이방인의 길, 미국에서의 재탄생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차가운 대우를 받은 서재필은 1885년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절망적인 나날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사업가 홀렌백의 도움으로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이때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바꿨습니다. 1892년 콜롬비아 의대를 졸업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의학사 학위를 얻었고, 189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역적의 아들에서 미국의 시민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국으로의 귀환과 새로운 사랑
미국에서 안정된 삶을 꾸리던 서재필에게 1895년 운명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박영효의 설득을 받은 그는 11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조선인 서재필이 아닌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중추원 고문이라는 최고 대우를 받으며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함께 데려온 아내 뮤리엘 암스트롱은 미국 대통령 가문 출신으로, 서재필이 불량배로부터 그녀를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독립신문 창간, 조선 언론사의 혁명
귀국 후 서재필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신문 발간이었습니다. 1896년 4월 7일,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4면 가운데 3면은 순한글로,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했습니다. 이 신문의 혁신성은 단순히 한글 사용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창간호에서 그는 이와 같이 선언했습니다. 300부로 시작한 발행부수는 3,000부까지 늘어났고, 조선 전국에 분국까지 설치하며 국민 계몽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민주주의의 첫걸음
독립신문 창간 3개월 후인 1896년 7월,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 단체는 단순한 계몽 조직을 넘어 조선 최초의 근대적 시민운동 조직이었습니다. 1898년 3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절영도 조차 반대를 결의했습니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도 주도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입법을 하고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추방과 평생의 동반자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 의지는 수구파와 열강의 견제를 불러왔습니다. 친러 성향의 정부와 러시아, 심지어 미국까지 결탁하여 그를 견제했습니다. 결국 1898년 4월, 남은 계약 기간 7년 10개월분의 봉급 28,200원을 모두 받는 조건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독립신문』은 윤치호에게, 독립협회는 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 맡겨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두 번째 미국행, 그는 다시 한번 조국에서 밀려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말년의 꺼지지 않는 조국 사랑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평범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마음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잡지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한인친우회를 조직하고 영자 독립신문을 간행하며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습니다. 1947년 해방 후에는 미군정 고문으로 잠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미국 국적으로 인해 정치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5일, 6·25 전쟁의 소식에 병세가 악화된 그는 87세의 나이로 타국 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영원한 유산, 근대 조선의 문을 열어젖힌 선구자
서재필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화'와 '독립'입니다. 그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민의 계몽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창간한 독립신문은 훗날 신문의 날(4월 7일)의 기원이 되었고, 그가 도입한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는 우리 언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활동은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재필은 단순히 언론인이나 의사가 아닌,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시대의 선각자였습니다. 그의 꿈은 비록 그 시대에는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