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정보
몰락한 명문가에서 피어난 총명함
1851년 경기도 여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민자영, 훗날 명성황후가 될 이 소녀는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한복판에서 눈을 떴습니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이씨였지만, 그녀의 집안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에서 고단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녀는 이미 특별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효경·여훈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의 변화를 읽는 예리한 안목은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종 친정의 숨은 설계자
1866년, 16세의 민자영은 고종의 왕비로 간택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세도를 경계하여 몰락한 집안의 딸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왕비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비가 된 그녀는 곧 시아버지 대원군과 치열한 정치적 대립을 시작하게 됩니다. 1871년 첫 아들을 낳았지만 5일 만에 잃는 비극을 겪으며, 이때부터 대원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는 기록은 그녀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강화도조약과 개화정책의 주역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명성황후의 본격적인 정치적 활동이 펼쳐집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과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는 것이 그녀의 개화정책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민씨 척족정치의 부활이라는 비판도 뒤따랐습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뚫고 선 지략가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량은 위기의 순간마다 빛을 발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궁중을 탈출했다가 환궁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무위로 돌리는데 일조했습니다. 당대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서재필은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한 외척정치가가 아닌, 뛰어난 정치가였음을 보여주는 증언입니다.
친러외교: 일제 견제의 마지막 카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 전략을 펼칩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당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는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일입니다. 이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극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완용 등 친러파를 기용하며 반일정책을 추진한 그녀의 노력은, 일본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을미사변: 일제 낭인에게 피살된 비극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야만적인 계획이 실행됩니다.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는 43세의 나이로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갓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무력으로 삼고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를 행동대로 삼아 경복궁을 기습하여 왕후를 참혹히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야만적 범죄였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조선 민족 전체를 분노하게 했고, 전국적인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을 부른 저항의 상징
명성황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을미사변이 초래한 거족적인 분노는 고종이 일본의 감시망에서 탈출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지방 유생들이 봉기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의지를 일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명성황후는 단순히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왕비가 아닙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조선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던 정치가이자, 외침에 굴복하지 않은 저항정신의 상징입니다. 친정 식구들을 끌어들여서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결국 나라를 그르친 인물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일제의 침략 앞에 희생된 조선의 국모라는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평가처럼, 그녀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한 여성의 의지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