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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와 쇄국의 아이러니, 조선의 마지막 실력자 흥선대원군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8. 31.

 

흥선대원군

기본 정보

이름: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생몰: 1821년 1월 24일 ~ 1898년 2월 22일
국적: 조선
직업: 왕족, 정치가, 섭정
한 줄 요약: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로 왕권을 강화하고 병인·신미양요를 물리쳐 조선 최후의 자존심을 지킨 최후의 실권자

세도정치 속에서 피운 역전의 꿈

1821년 겨울, 왕실의 방계 혈통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운명을 바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서화를 배우며 문화적 소양을 기르는 한편,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하며 세도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치밀한 위장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은 1863년 12월이었습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와의 밀약을 통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12세의 나이로 고종에 즉위시켰습니다. 왕실의 방계에서 갑자기 국왕의 아버지가 된 그는 '흥선대원군'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으며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개혁의 칼날, 세도정치를 베다

1864년부터 시작된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조선사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60여 년간 국정을 농단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을 단행했습니다. 노론 독점체제를 깨고 남인, 북인까지 고루 기용하며 "능력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라는 파격적인 인사정책을 펼쳤습니다.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특히 서원 철폐는 그의 개혁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었습니다. 원래 교육기관이었던 서원들이 세도정치 시기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자, 1871년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습니다.

경복궁 중건, 왕권의 상징을 되살리다

1865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망이 가장 웅장하게 표현된 프로젝트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지 270여 년 만에 재건된 경복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왕권 회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처음 완성한 경복궁의 10배나 되는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공사는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가져왔습니다. 원납전 강제 징수와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물가 상승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그의 정치적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혁신적 세제개혁, 호포제의 도입

흥선대원군의 가장 혁신적인 정책 중 하나는 1871년 시행된 호포제였습니다.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두 냥씩을 부과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신분제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양반도 평민과 동등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이 정책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기득권 양반층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침에 맞선 결사 항전, 병인·신미양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사건들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침입에 맞서 단호한 항전 의지를 천명하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습니다.

비록 조선군이 전술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끝내 개항 요구를 거부하고 외국 함대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성과였습니다. 이는 조선의 자주성을 지킨 마지막 승리로 평가받습니다.

최익현의 직언과 권력의 몰락

1873년 10월, 면천군수 최익현이 올린 상소는 흥선대원군 집권의 종언을 알리는 종소리였습니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날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경복궁 중건의 폐해, 서원 철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성년이 된 고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지지를 받은 이 상소는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10년간의 실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의 강력한 개혁정치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영원한 논쟁, 개혁가인가 수구주의자인가

흥선대원군의 삶은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했습니다. 안으로는 과감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밖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쇄국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로 상징되는 그의 개혁정신은 분명 진보적이었지만, 서구 문명과의 접촉을 거부한 것은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서구 열강의 침탈 앞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그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는 조선 마지막 실력자로서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낸 비극적 영웅이었습니다. 개혁과 수구,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거대한 전환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