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이름: 서희(徐熙)
생몰: 942년 ~ 998년 7월 14일
국적: 고려
직업: 문신, 외교관, 정치가
한 줄 요약: 거란의 80만 대군을 말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획득하여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시킨 역사상 최고의 외교 전략가
호족의 품격이 빚어낸 미래의 거장
942년, 고려가 막 건국의 기반을 다지던 시기 경기도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서희, 훗날 거란의 대군을 말 한마디로 물리치며 고려 외교사에 전설을 남길 인물이었죠.
그의 집안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서신일은 신라 말기의 혼란을 예견하고 벼슬을 버린 채 은거한 현자였고, 아버지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내의령이라는 최고직에 오른 대쪽 같은 재상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 서필에게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할아버지 서신일이 80세가 넘어서야 얻은 늦둥이 아들인 서필은, 서신일이 상처받은 사슴을 구해준 뒤 산신령의 은혜로 얻었다는 설화가 전해지죠. 그 산신령이 "그대의 후손들이 대대로 재상에 올라 영달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는 훗날 서희 일가의 찬란한 영화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조용한 수재의 조용한 반항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서희는 결코 모범생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960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갑과로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 등을 역임하며 탄탄한 관료의 길을 걸었죠.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성종과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종이 서경 순행 중 몰래 영명사에서 놀이를 즐기려 하자 서희는 과감히 간언을 올려 중지시켰습니다. 또 해주에서 성종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려 하자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고, 술을 올리라는 어명에도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며 막사 밖에서 술을 올렸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권위에 아첨하지 않는 서희의 곧은 성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송나라 사신으로 세상을 보다
972년, 서희에게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사신단의 정사로 파견된 것이죠. 이는 당시 서희가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대한 임명이었습니다.
송나라에서 서희의 품격과 언변을 본 송 태조는 감탄하여 검교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단순히 고려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가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거란과 송이 패권을 두고 벌이는 거대한 게임의 판도를 이해하게 된 것이죠. 이 통찰력이야말로 훗날 그가 거란과의 담판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운명의 담판, 역사를 바꾸다
993년, 고려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거란의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 것입니다. 봉산성이 함락되고 고려군이 참패하자,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대다수의 신하들이 항복하자거나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을 주장할 때, 오직 서희만이 달랐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허풍이며, 그들의 진짜 목적이 고려 정복이 아닌 송나라와의 전쟁을 위한 후방 안정에 있다고 간파했습니다.
성종이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침묵하는 군신들 속에서 홀로 일어선 서희.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한 마디로 고려사의 물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기싸움에서 이긴 협상가
거란 진영에 홀로 들어선 서희를 기다린 것은 소손녕의 위압이었습니다. "먼저 대국의 귀인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갖추어라!" 하지만 서희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소손녕이 굴복하여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마주 앉게 되었죠.
소손녕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침공을 정당화했습니다. 첫째,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거란의 것이고, 둘째,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수를 던졌습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지역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막고 있어 양국 교류가 어렵습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을 쌓으면 어찌 조빙을 닦지 않겠습니까?" 거란과 함께 여진을 축출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는 제안이었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은 승리
서희의 놀라운 제안에 소손녕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거란 황제에게 보고한 결과, "고려가 이미 화해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소손녕은 7일 동안 잔치를 베풀며 서희에게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천 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서희가 돌아오자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가 맞이할 정도로 기뻐했죠. 다음 해 994년부터 3년에 걸쳐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습니다.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로 이루어진 강동6주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전략적 요새였습니다. 훗날 거란의 2차, 3차 침입 때 강감찬과 양규 같은 명장들이 이 지역을 거점으로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서희가 마련한 이 토대 덕분이었습니다.
충신의 마지막 모습
말년의 서희는 여전히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996년 병으로 개국사에서 요양할 때 성종이 직접 행차하여 어의와 말을 하사하고 곡식 천 석을 시주할 정도였죠.
998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종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등 엄청난 부의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에게 내려진 시호 '장위(章威)'는 '문장이 뛰어나고 위엄이 있다'는 뜻으로, 그의 일생을 완벽하게 요약한 표현이었습니다.
영원한 외교관의 전설
서희는 단순히 위기를 모면한 외교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계승국임을 분명히 하고, 압록강까지의 영토 회복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낸 전략가였습니다. 무력이 아닌 지혜로, 굴복이 아닌 당당함으로 승리를 쟁취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2009년 외교부가 선정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가 바로 서희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강한 자에게 굽히지 않으되 약한 자를 짓밟지도 않는다"는 서희의 외교철학은 천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혜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협상이란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아내는 지혜임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