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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를 건너 고구려를 건국한 영웅왕, "동명성왕 주몽"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3.

 

동명성왕 주몽 무덤

기본 정보

이름: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
생몰: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국적: 고구려
직업: 고구려의 건국자, 초대 왕
한 줄 요약: 알에서 태어나 비류수를 건너 동북아 대제국 고구려를 건국한 영웅 군주

천신과 하백의 딸이 낳은 신비한 알

아득한 옛날, 동부여의 금와왕이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하백의 딸 유화부인으로, 자신이 하늘의 아들 해모수와 사랑에 빠졌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긴 금와왕이 그녀를 궁으로 데려오자, 신비하게도 햇빛이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며 비추더니 마침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화부인이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다섯 되나 되는 커다란 알이었습니다.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들은 오히려 그 알을 보호했습니다.

소와 말도, 새들도 모두 그 알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주몽이었습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는데, 이 아이가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재능이 부른 시련의 나날들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자랐지만,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특히 기마술과 활쏘기에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몽의 뛰어남은 오히려 화를 불러왔습니다.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이 주몽을 시기하며 제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저놈이 저렇게 잘난 체하며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면, 언젠가 우리가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대소는 동생들과 함께 주몽을 없애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부여를 떠날 것을 권했습니다. "아들아, 이곳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 너의 운명은 여기가 아니라 더 큰 곳에 있느니라."

물고기와 자라가 만든 기적의 다리

주몽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세 명의 충실한 친구들과 함께 부여를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대소가 보낸 추격병들이 바짝 뒤쫓아왔고, 주몽 일행 앞에는 엄리대수(지금의 비류수)라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주몽은 강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신 추모 임금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자라를 띄워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강물이 용솟음치며 수많은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주몽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다시 강물로 사라져 추격병들은 더 이상 쫓아올 수 없었습니다.

졸본에서 이룬 고구려 건국의 위업

위기를 넘긴 주몽은 압록강 중류의 졸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졸본부여왕의 딸 소서노와 만나 결혼하고, 소서노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소서노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과 인맥을 동원해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마침내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고(高, 크다)'와 '구려(성)'를 합친 말로 '큰 성'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몽은 건국 후 즉시 주변 세력들을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류국의 송양왕과 활쏘기 경합을 벌여 승리하고, 계략을 써서 송양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유리의 귀환과 백제 건국의 씨앗

고구려가 안정되던 기원전 19년, 주몽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부여에 두고 온 첫 번째 아내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였습니다. 주몽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친아들과의 재회에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유리 형님이 왕이 된다면 우리는 구차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몽은 아쉬워했지만 그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떠난 비류와 온조는 훗날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덕치와 무력으로 다진 강국의 기반

주몽은 단순히 나라를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구려가 동북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체계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쳤습니다.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복하고, 북옥저를 멸망시키며, 말갈족 부락들을 평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습니다.

주몽의 통치 철학은 무력만이 아니라 덕치에 기반했습니다. 그는 천손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백성들을 보살피는 성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뛰어난 외교 감각으로 부여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했습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부여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는 감사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용의 머리를 밟고 오른 하늘 길

기원전 19년 9월, 주몽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도 범상하지 않았습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명왕편』에는 "왕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태자가 왕의 옥 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주몽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가 세운 고구려는 아들 유리명왕을 거쳐 700년간 동북아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같은 영웅들이 주몽의 뜻을 이어받아 만주 대륙을 종횡무진 누볐습니다.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유산

주몽의 이야기는 단순한 건국신화를 넘어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을 상징합니다. 알에서 태어나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의 정신, 비류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용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라고 외쳤던 그의 당당함은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주몽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영원한 영웅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세운 백제와 함께, 주몽의 정신은 한민족의 DNA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 오늘날까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