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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읽고 불탑을 세운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5.

 

 

선덕여왕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선덕여왕 (善德女王, 김덕만)
생몰: 595년 ~ 647년 1월 17일
국적: 신라
직업: 신라 제27대 왕, 한반도 최초의 여성 통치자
한 줄 요약: 천문학적 지혜와 불교 문화 진흥으로 신라 통일의 기반을 다진 현명한 여성 군주

예언과 지혜로 빛난 어린 시절

7세기 신라 왕궁에서 태어난 김덕만, 훗날의 선덕여왕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통찰력을 보인 공주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본 어린 덕만이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림 속 모란꽃 주변에 벌이나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음을 간파한 것이었죠. 이런 세심한 관찰력과 논리적 추론 능력은 그녀가 훗날 왕이 되어 보여줄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전조였습니다. 아버지 진평왕 슬하에서 자라며 그녀는 불교 경전과 유교 경서를 두루 섭렵했고, 특히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왕위 계승의 험난한 길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여성이 최고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는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담을 들며 여성의 통치를 불길하게 여기는 시각이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덕만은 이런 편견을 지혜와 덕망으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632년 즉위한 그녀는 "선덕(善德)"이라는 연호를 통해 선량한 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실제로 그녀의 치세는 이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과 희생 사이의 개인적 삶

선덕여왕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지냈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 군주로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혼을 통해 다른 세력과 연결되면 자신의 독립적인 통치권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계자 문제도 복잡했습니다. 직계 후손이 없었던 그녀는 사촌 동생인 승만(훗날의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이는 왕권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깊은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개인의 행복보다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한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희생이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 운명적 동반자들

선덕여왕의 치세를 빛낸 것은 뛰어난 인재들과의 협력이었습니다. 특히 김춘추(훗날의 태종 무열왕)와 김유신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전략가로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신라의 생존을 위한 묘책을 제시했고, 김유신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신라군을 강화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혜안을 보였습니다. 특히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나당동맹의 기초를 다진 것은 훗날 신라 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현명한 신하를 얻는 것이 왕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말하며 인재 등용에 힘썼습니다.

첨성대와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대한 유산

선덕여왕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는 첨성대 건설입니다.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당시 신라의 과학 기술력과 천문학적 지식을 집약한 걸작이었습니다. 높이 9.17미터의 이 석조 건물은 정교한 계산에 의해 설계되어 계절의 변화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은 황룡사 구층목탑입니다.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목탑은 각 층이 신라의 적국들을 상징하며, 이를 누르겠다는 의지를 담은 상징적 건축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건축 사업은 신라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자부심을, 적국에게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담의 난과 마지막 승부

647년, 선덕여왕의 통치 15년 차에 일어난 비담의 난은 그녀 생애 마지막 위기였습니다. 진골 귀족 비담과 염종은 "여주불능제국(女主不能帝國)", 즉 "여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안 된다"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몸이 쇠약해진 선덕여왕이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혜로운 대응을 보였습니다. 반란군이 "여왕성(女王星)"이 떨어졌다며 민심을 동요시키자, 그녀는 즉시 궁녀들을 시켜 비단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며 "여왕성이 다시 떠올랐다"고 맞받아쳤습니다. 하지만 오랜 병환을 앓던 그녀는 반란이 진압되기 직전인 647년 1월 17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 직전 그녀는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후에 이곳에서 불국사가 건립되어 그녀의 혜안을 다시 한 번 증명했습니다.

천년을 넘어 빛나는 선구자의 정신

선덕여왕은 단순히 한반도 최초의 여성 통치자라는 의미를 넘어, 지혜로운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녀가 세운 첨성대는 오늘날까지 경주의 상징으로 남아있고,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불교 문화 진흥 정책은 신라가 찬란한 불교 예술의 꽃을 피우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성도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읽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군주의 도리"라고 했던 그녀의 말처럼, 선덕여왕의 삶은 성별을 뛰어넘어 진정한 지도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천문학적 지혜와 정치적 혜안,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이끈 그녀의 정신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