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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든 성군, "세종대왕"의 한글(훈민정음) 창제 여정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8. 11.

세종대왕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이도(李祹), 세종대왕

생몰: 1397년 5월 15일 ~ 1450년 3월 30일

국적: 조선

직업: 조선 제4대 국왕, 성군

한 줄 요약: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문자 생활의 길을 열어준, 조선 최고의 성군이자 문화 군주

왕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셋째 왕자

1397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손자로 태어난 이도는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왕위와는 거리가 먼 위치였지만, 그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과 인품은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는 경서와 사서를 탐독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 정치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형들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그는 이미 "백성이 곧 하늘이다"라는 민본주의 사상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훗날 그가 왕이 되어 펼친 모든 정책의 근간이 되었고, 특히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22세에 왕위에 오른 학자 군주

1418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처음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즉위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현명한 신하들을 곁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학자들을 모으고, 이들과 함께 밤낮없이 학문을 논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늘 한 가지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자로만 이루어진 문자 체계 때문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현실이었습니다. "내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니,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러한 왕의 고민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 진정한 애민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왕비 소헌왕후와의 동반자적 삶

세종의 곁에는 평생의 동반자인 소헌왕후 심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왕의 아내가 아닌, 그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몰두할 때도 소헌왕후는 묵묵히 그를 뒷받침했고, 궁중 여성들을 통해 실제 생활에서 새로운 문자가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8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세종은 바쁜 정무 중에도 자녀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문종과 안평대군 등은 아버지의 학문적 열정을 물려받아 훗날 조선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한 지적 여정

세종의 가장 큰 동지들은 집현전의 학자들이었습니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그의 뜻에 공감하며 한글 창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하들이 이 사업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중국의 문자를 버리고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중화질서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때 세종이 보인 신념은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나라마다 말이 다른데, 어찌 모든 나라가 중국 글자만 써야 하는가?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가 있어야 백성들이 쉽게 배워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확고한 의지 앞에서 반대 세력들도 점차 설득되어 갔습니다.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1443년, 마침내 세종은 28글자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을 완성했습니다. 이 글자의 이름 자체가 그의 철학을 담고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배워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하겠다는 세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한글의 창제 원리는 그 자체로 과학적 혁명이었습니다. 소리를 내는 입의 모양을 관찰하여 글자 모양을 만들고, 천지인의 철학을 바탕으로 체계를 구성한 것은 세계 문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발명이었습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훈민정음 서문의 첫 구절은 세종의 애민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과학과 문화의 황금기를 연 성군

한글 창제 외에도 세종의 업적은 실로 방대합니다. 장영실과 함께 각종 과학 기구를 발명하고,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업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향약집성방』을 통해 우리나라 의학을 체계화했습니다. 음악 분야에서는 아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개발했으며, 역법을 정비하여 『칠정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랑스러워한 것은 한글이었습니다. 세종은 한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한글 보급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용비어천가와 같은 작품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고, 관리들에게 한글 교육을 의무화하기도 했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완성한 마지막 꿈

말년의 세종은 당뇨병과 눈병 등으로 고생했지만, 끝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신하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며 새로운 정책을 구상했고, 한글 보급 사업을 계속 추진했습니다. 1450년 3월 30일, 세종은 "내가 만든 글자가 백성들에게 널리 쓰이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백성들의 삶이었고, 자신이 만든 문자가 과연 후세에 전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한글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성군

세종대왕은 단순히 조선의 왕을 넘어 한민족 전체의 문화적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한글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네스코는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세종대왕 문해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 한국어로 사고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570여 년 전 한 성군의 백성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종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민위천본(民爲天本)",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그의 철학은 지금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리더십의 모범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