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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개경까지, 성리학을 뿌린 고려의 마지막 스승 목은 "이색"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8. 8.

 

이색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이색(李穡)
생몰: 1328년 6월 17일 ~ 1396년 6월 17일
국적: 고려
직업: 성리학자, 문신, 교육자, 시인
한 줄 요약: 고려에 성리학을 정착시키고 정몽주·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양성한 동방의 대문호

바다가 키운 아이, 경이로움의 시작

1328년 경상도 영해부 괴시리, 푸른 동해를 마주한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 김택의 품에서 자란 이색은 어려서부터 바다와 함께 자랐습니다. 넓은 동해와 아름다운 해송 숲길을 홀로 거닐며 사색하던 소년의 눈에는 세상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를 쓰며 "바다에 노니는 고기를 내려다보며" 지은 명문은 이 유년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바다가 주는 무한함과 자연의 질서는 그의 마음속에 학문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놓았고, 이는 평생에 걸쳐 그의 지적 탐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피어난 꿈

학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색의 청년기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어린 나이에 부친 이곡이 원나라에서 관직을 하다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일찍이 현실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원나라 국자감에서 3년간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을 입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그는 단순한 암기 위주의 학문이 아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학문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기의 좌절과 성찰은 그로 하여금 단순히 개인의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학문을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학문, 그리고 변화의 바람

권중달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한 이색은 가정을 이루며 안정된 삶 속에서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개인적인 행복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고려 말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원나라의 쇠락, 명나라의 등장이라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그는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이야말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가정에서의 평온함이 오히려 그에게는 더 큰 사명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후학 양성에 힘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들, 지성의 사슬

이제현의 제자로서 정주학을 배웠던 이색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지적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지 않고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는 정몽주, 권근,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 되어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제자들은 후에 고려 유지파와 조선 개국파로 나뉘어 정치적으로는 적이 되었지만, 모두 스승에게서 배운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각자의 신념을 실현해 나갔습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둘 다 이색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했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색이라는 한 스승 아래서 얼마나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리학의 씨앗을 뿌린 위대한 교육자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한 이색의 가장 큰 업적은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5번의 관장을 하며 132명의 인재를 선발하는 등 성리학의 발전과 교육 진흥에 큰 공헌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을 일으킨 유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넘어, 제자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기르도록 도왔습니다. 목은고 55권에는 무려 4,370 제목의 1만여 수 시와 244 제목의 문장이 전해지는데,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고려조에 유일한 대가로 인정받아 당대 최고, 문장의 조종, 동방의 대문호로 불릴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취는 후대에 길이 남을 유산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선택, 끝까지 지킨 절의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는 격변의 순간,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던 이색의 마지막 행보는 그의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 한산백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는 그의 말에는 변절하지 않는 지식인의 품격이 담겨 있습니다.

"차라리 오늘 버림을 받을지언정 다음에 어리석은 비웃음을 받지 않겠다"

그의 말은 오늘날에도 지식인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1396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영원히 흐르는 지성의 강

이색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단순히 성리학의 전래나 제자 양성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스승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영원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제자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폭넓은 사상적 토양을 제공한 그의 교육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괴시리의 소년이 결국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진정한 교육자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