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한 해상왕의 꿈과 야망, "장보고"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9.

 

 

장보고 동상
이름: 장보고(張保皐)
생몰: 790년경 ~ 841년
국적: 신라
직업: 군인, 해상 세력가, 무역상
한 줄 요약: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해상실크로드를 완성한 9세기 최고의 해상왕

바다가 부른 아이, 궁복의 탄생

9세기 초 완도 어딘가의 가난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우리말로는 '활보', 즉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하며 어린 시절부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의 기질을 보였던 그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아이답게 물과 친숙했고 바다의 거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한들, 골품제라는 혈연에 바탕을 둔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이 아니면 중요한 요직에 나갈 수 없는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어린 궁복의 마음속에는 이미 좁은 섬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무령군, 활보에서 장보고로

20대 초반, 절친한 친구 정연과 함께 중국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장보고'라 불렀습니다. 활 궁(弓)자가 부수로 들어있는 베풀 장(張)자를 성으로 삼고, 복(福)을 두글자로 보고(保皐)라는 이름으로 풀어 중국식 세글자 이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서주의 무령군에 입대한 그는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중소장의 직책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보고에게 정말 중요한 경험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고, 중동과 인도, 동남아시아, 그리고 신라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당을 중심으로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교통로로 중요했던 것이 바로 바닷길이었습니다. 바닷가 출신이었던 그는 이 거대한 해상 무역망을 보며 새로운 꿈을 키워갔습니다.

의로운 분노, 청해진 설치의 명분

그런데 장보고의 눈에 참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해적들이 신라의 양민을 잡아다 중국에 노예로 파는 참상이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들이 짐승처럼 팔려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

이라는 신념으로, 그는 828년 신라로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했습니다. "당의 여러 곳을 살펴보니 해적들이 우리 신라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을 소탕하고, 그들이 백성들을 서쪽으로 데려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간언한 그는 왕으로부터 1만 명의 군사를 허가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동아시아 해상 패권의 주인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지 1년만에 해적이 소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야망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청해진은 군사와 무역체제를 갖춘 군·산·상 복합체로서 일본 하카다와 중국의 적산, 영파 등지에 지사를 갖춘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였으며, 동남아와 아라비아상인이 오가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장보고는 단순한 해적 토벌을 넘어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실시하며,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이슬람 상인들의 주 이용 항로인 동남아, 인도항로와 동아시아 항로를 연결시킴으로써 아랍으로부터 신라와 일본으로까지 연결되는 해상실크로드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무역선들은 동아시아 바다를 누비며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는 명실상부한 '해상왕'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개입과 권력의 정점

장보고의 영향력은 경제를 뛰어넘어 정치 영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신라 후기 왕위 계승 분쟁이 치열했던 시기,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고, 김우징은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고,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공으로 그는 감의군사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습니다. 신라 역사상 일개 지방 세력가가 왕의 운명을 좌우한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극적 최후, 시대의 한계

하지만 장보고의 꿈은 신라 기존 질서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귀족과 신하들이 장보고가 신라 왕을 탐한다며 지속적으로 문성왕에게 경고했고, 결국 문성왕은 예전의 장보고의 부하였던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습니다. 846년, 동아시아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던 해상왕 장보고는 이처럼 허무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자 청해진은 폐쇄되었고,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장보고 이후 후삼국으로 분열된 신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장보고의 후예인 왕건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영원한 유산, 해상실크로드의 개척자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왕"
-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

장보고는 단순한 무역상을 넘어 동아시아 해상 질서를 재편한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구축한 해상 네트워크는 단순히 물건만 오간 것이 아니라 문화와 종교, 기술이 교류하는 통로였습니다.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구법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현지 신라인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삶은 정치적 음모로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바다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려 했던 그의 비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장보고야말로 해양을 통한 번영과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 우리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국제적인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해상왕'이라는 호칭은 과장이 아닌, 그가 실제로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 것입니다.

 

#장보고 #해상왕 #청해진 #신라무역 #동아시아해상실크로드 #궁복 #무역혁신 #신라역사 #해상네트워크 #글로벌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