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정보
개척자의 꿈: 의지가 만든 영웅
1107년 겨울, 함경도 벌판에 17만 고려군이 북진하는 모습을 바라본 사람이 있다면 그 장엄함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 선두에 선 한 노장의 눈빛은 결연했습니다. 수차례의 패배와 굴욕을 딛고 일어선 윤관, 그는 단순한 정벌이 아닌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대의와 조국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 문신이 명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윤관의 이야기는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인생 서사입니다.
공신 가문의 아들, 뿌리 깊은 충정
파평에서 태어난 윤관은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4대손이었습니다. 아버지 윤집형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관료였지만, 당시로서는 그리 높은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윤관이 태어날 무렵의 파평 윤씨는 아직 후대의 명문가 모습을 갖추기 전이었죠.
어린 시절 윤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마도 가문에 전해내려오는 개국공신으로서의 자긍심이었을 것입니다. 고조부 윤신달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다는 가문사는 그에게 나라에 대한 의무감과 충정을 심어주었습니다. 훗날 그가 보여준 국가에 대한 헌신적 태도의 뿌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과급제에서 외교관까지, 문신의 길
1073년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윤관은 처음엔 전형적인 문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습유, 보궐 등 간관직을 거쳐 1087년에는 합문지후가 되어 광주, 충주, 청주를 시찰하는 출추사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095년 숙종 즉위 때 요나라에, 1098년에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일입니다. 숙종의 즉위는 어린 조카 헌종으로부터 양위받은 것이라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윤관은 이미 이 시기부터 숙종의 측근으로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련과 각성: 첫 번째 여진 정벌의 참패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오랜 기간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11세기 후반, 완안부라는 강력한 여진 부족이 등장하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1103년 우야소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미쳤고,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에게 여진 정벌을 명했으나 오히려 여진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이어 1104년 윤관이 동북면행영도통이 되어 출정했지만, 그 역시 벽등수에서 크게 패하여 군사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윤관의 이 분석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혁신의 결실: 별무반 창설
패배를 통해 적을 알게 된 윤관은 혁신적인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기병 위주의 여진과 맞서 싸울 특별한 군대를 만들자는 것, 바로 '별무반'이었습니다.
별무반은 기병으로 이루어진 신기군, 보병으로 조직된 신보군, 승려들로 꾸린 항마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에 활을 주무기로 하는 부대, 기계식 활인 노를 다루는 부대, 돌격 부대, 화공 부대 등 각종 특수 무기를 사용하는 부대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윤관의 탁월함은 단순히 기병을 만든 것이 아니라, 관리에서 상인, 노비까지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전국민적 군사조직을 구상한 데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 전체의 국력을 집중시키는 혁신적 발상이었습니다.
복수와 영광: 동북9성의 개척
1107년 모든 준비를 마친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정벌에 앞서 윤관은 여진족 추장들을 속여 불러낸 뒤 일시에 제거하는 계략을 썼습니다. 비록 친고려파 추장들까지 죽이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여진족에게는 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고려군은 여진촌락 135개를 쳐서 포로 1,030명, 사살 4,940명 등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윤관은 단순한 정벌에 그치지 않고 획득한 영토에 9개의 성을 축조했습니다.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으로 불린 동북9성에는 남쪽에서 백성들을 이주시켜 고려의 실질적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았습니다.
꿈의 좌절: 9성 반환과 몰락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다는 조건을 걸고 동북9성 반환을 간청했습니다. 9성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 지리적 불리함, 지속적인 여진의 공격 등이 고려 조정을 압박했습니다.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 한상은 반대했으나 고려조정의 대세는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윤관은 끝까지 반대했지만 1109년 결국 9성을 돌려주게 되었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공신호를 박탈당했습니다.
마지막 여정: 불굴의 정신으로 생을 마감하다
예종은 윤관을 보호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예종은 얼마 뒤 그에게 다시 관직을 내렸으나, 윤관은 이를 고사하였습니다. 그리고 111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윤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꿈꿨던 북방 개척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가 창설한 별무반과 9성 개척의 경험은 후대에 귀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영원한 유산: 개척정신과 현재적 의미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섭니다.
첫째, 그는 실패를 통해 배우고 혁신하는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첫 번째 패배 후 별무반이라는 획기적인 군사제도를 창안한 것은 탁월한 학습능력의 증거입니다.
둘째, 그의 9성 개척은 후대 세종대왕의 6진 개척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윤관의 실패는 조선이 더 치밀한 준비로 성공할 수 있게 한 디딤돌이었습니다.
비록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도전정신과 혁신 의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불굴의 의지로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윤관의 삶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꿈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진정한 가치임을 일깨워주는 영원한 등대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