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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으로 민족정신을 노래한 백운거사, "이규보"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8. 5.

 

 

이규보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이규보 (李奎報)
생몰: 1168년 12월 16일 ~ 1241년 9월 2일
국적: 고려
직업: 문신, 시인, 외교관
한 줄 요약: 불멸의 민족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 계승의식을 천명하고, 최고의 문장력으로 몽골과의 외교를 담당한 고려 최고의 문인

흰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탄생

116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이규보는 처음부터 천재의 기질을 보인 아이였습니다. 9세 때부터 경사, 백가, 노불의 문헌을 모두 섭렵하여 한 번만 읽으면 기억하는 기발한 재사였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1세 때 지은 "종이 길에 모학사(붓)가 줄지어 가고 잔속에는 늘 국선생(술)이 있네"라는 시는 이미 시와 술을 사랑하는 풍류인의 기질을 보여주는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호 백운거사는 구름처럼 자유분방하던 그의 모습을 구름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새로움과 개성을 추구하던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삼혹호 선생의 좌절과 재기

이규보의 청년기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6, 18, 20세에 각각 과거를 보았지만 세 차례 모두 연거푸 낙방했죠. 본인도 이 때는 술 때문에 망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22세 되던 해, 꿈에서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의 화신이 나타나서 "합격이요."라고 알려주었다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 후 마침내 과거에 급제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인저에서 '규보'로 바꾸었는데, 이는 규성(奎星)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평생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그의 문학 세계와 인생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천마산 은거와 불멸의 서사시 탄생

과거에 급제했지만 무신정권 하에서 관직을 얻지 못한 이규보는 25세에 개성의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생애 최고 걸작이 탄생한 때였습니다. 동명왕편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가 지은 한문 서사시로, 오언 282구의 장편 인물 서사시로 약 4,000자에 이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중화중심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 및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천추만대에 전하겠다는 의도에서 창작되었습니다. 무신정변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이규보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불멸의 작품이었죠.

최씨 정권 하의 문필가와 현실주의자

30대 후반, 이규보는 최충헌을 국가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서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1207년 이인로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에 임명된 것이 그의 관료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최씨 정권의 핵심 문신으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의 국선생전은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 작품으로, 바람직한 신하의 모습과 신하로서의 올바른 처신을 교화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무신정권이라는 현실 속에서 문신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그의 고민이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의 중심인물

1231년 몽골이 침입하자 이규보의 진가가 발휘되었습니다. 이규보는 이 때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원나라에 보내는 청탁 글이 몽고군 장수 살리타를 감동시켜 철군하게 한 이후 고려 조정은 이규보에게 국서에 관한 일을 전담케 하고 그에게 의지했습니다. 1232년 최우의 강화천도를 지지했던 이규보는 강화도에서 최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관로도 탄탄대로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최우와 이규보 등이 누렸던 여유로운 삶의 모습은 온 나라가 전란에 휘말려 있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최고의 문장가이자 혁신적 문인

이규보는 단순히 권력에 빌붙은 문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인로의 용사론이 과거의 고전에서 좋은 구절을 응용하여 시를 짓자는 의견인 반면 이규보는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여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독창적인 표현을 써야한다는 신의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기존 한시에서는 쓰지 않았던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그 표현이 탁월한 명구절들이 많습니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년 무렵 이규보가 쓴 「신인상정예문발미」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발문에는 상정고금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금속활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백운 같은 삶의 마지막

1237년 문하시랑평장사로 관계에서 사퇴한 이규보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국조의 고문대책과 외국에 오가는 서표 등을 지었으며 74세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운은 노년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아호 삼혹호선생에 걸맞게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하고, 병상에 누워서도 풍월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1241년 9월 2일에 72세를 일기로 한 점 백운 같았던 풍류거사의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영원한 유산과 현재적 평가

이규보는 동명왕편이 이후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 초기의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창작에도 영향을 끼쳐 민족 서사시의 정통을 최초로 수립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최씨 정권에 협력한 현실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지만, 몽골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고, 무엇보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은 총 53권 13책으로 아들 이함이 편집하여 간행했으며, 오늘날까지 고려시대 문학과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백운거사 이규보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지식인의 고뇌와 의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거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