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정보
운명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12세 소년
1863년 12월, 후사가 없던 철종이 승하하자 궁궐은 다음 왕위 계승자를 놓고 조용한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화를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를 자처하며 은거했던 흥선군 이하응과 순조의 며느리인 조대비 사이의 정치적 밀약. 그 결과 열한 살 소년 이명복이 익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선의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어린 고종에게 왕위는 축복이 아닌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외척연합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배는 이미 폭풍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어린 선장은 아직 키를 잡을 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까지
고종의 청년기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 아래 보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 강력한 개혁은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정작 고종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1873년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고종은 부인 명성황후와 그 일족, 그리고 아버지 대원군 사이의 권력 다툼 속에서 진정한 군주권을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종의 초기 통치는 끊임없는 내우외환의 연속이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거대한 세력 사이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왕비의 죽음과 피할 수 없는 선택
고종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이 사건은 고종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세자와 함께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1년간의 러시아 공사관 체류는 고종에게 굴욕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구상을 펼칠 수 있는 숨통이기도 했습니다.
황제의 꿈, 대한제국의 탄생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마침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해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습니다.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는 이 순간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된 제국임을 내외에 천명하는 역사적 선언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큰 한나라'라는 뜻으로, 고종의 원대한 꿈을 담고 있었습니다.
광무개혁: 근대국가를 향한 마지막 도전
황제가 된 고종은 광무개혁이라는 야심찬 근대화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토지조사사업과 지계 발급으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를 확립하려 했고,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고, 징병제 도입을 통해 근대적 군대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외교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고종의 꿈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었지만, 고종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고 기록됩니다.
고종의 마지막 저항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일본의 강제 퇴위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덕수궁의 마지막 12년
1907년 강제 퇴위 이후 고종은 덕수궁에서 이태왕이라는 굴욕적인 호칭으로 불리며 12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일제의 식민통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할 때까지 고종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고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과 이로 인한 3·1운동의 촉발은 그가 마지막까지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장례식인 인산일에 맞춰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고종이 단순한 망국의 군주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영원한 과제: 자주와 근대화
고종은 분명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황제권 강화에 치중한 나머지 민권 신장에는 소홀했고, 외세 의존적 외교정책으로 인해 자주성을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조선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던 개혁군주였으며, 마지막까지 국권 회복을 포기하지 않은 저항 정신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임종 직전 말은 격동의 44년 재위 기간 동안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했던 한 군주의 마지막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뇌했던 그의 치열한 노력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