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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해방과 과거제로 왕권을 세운 개혁 군주, "광종"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8. 1.

 

 

광종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왕소(王昭), 광종(光宗)
생몰: 925년 ~ 975년
국적: 고려
직업: 고려 4대 국왕, 개혁 군주
한 줄 요약: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로 고려의 기틀을 완성한 '제2의 창업 군주'

태조의 아들, 혼란 속에서 태어나다

925년, 고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왕소는 처음부터 왕좌가 약속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위해 29명의 부인을 두어 25명의 아들을 낳은 상황에서, 그는 수많은 형제들 중 하나에 불과했죠.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남다른 야심과 침착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태조로부터 뛰어난 용모와 자질을 인정받았던 왕소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왕실의 핵심 인물로 주목받았고, 형 정종과 함께 서경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언젠가는 자신이 고려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칼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다

949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종의 첫 7년은 '잠복기'였습니다. 아직 호족들의 힘이 강했고, 성급한 개혁은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독수리가 발톱을 숨기듯 조용히 내치에 힘쓰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공신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각 지방의 세공 액수를 정하는 등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매진했죠.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거대한 개혁의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정관정요를 탐독하며 당나라 태종의 치세를 꿈꾸던 그는, 진정한 왕권 강화를 위한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복누이와의 혼인, 복잡한 가족사

광종의 개인적 삶은 고려 초기 왕실의 복잡한 혼인 정치를 보여줍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놀랍게도 그의 이복누이였습니다. 태조와 신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왕실 내 혈연 결속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선택이었죠. 두 번째 부인 경화궁부인은 이복형 혜종의 딸로, 역시 조카뻘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근친혼은 당시로서는 왕실의 순수 혈통을 지키고 외척의 힘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지만, 광종에게는 개인적인 고뇌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훗날 5대 왕이 되는 경종을 비롯해 효화태자, 세 명의 공주를 낳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친아들마저 의심하는 비극적인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쌍기와의 만남, 운명을 바꾸다

광종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인물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였습니다. 956년, 광종 7년차에 이루어진 이 만남은 고려사의 전환점이 되었죠.

"중국에서 실시되어 온 과거제를 고려에서도 실시해 보십시오."

쌍기의 이 건의는 광종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호족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왕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층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광종은 쌍기를 한림학사로 승격시키며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이후 많은 중국계 귀화인들을 등용하여 자신만의 친위세력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는 내국 호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지만, 광종은 이미 자신의 길을 정했습니다.

노비해방의 혁명, 호족의 기반을 흔들다

956년, 광종이 단행한 노비안검법은 고려사에 길이 남을 혁명적 조치였습니다. "원래 양인이었는데 전쟁이나 빚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자유민으로 돌려보낸다."

이 정책의 표면적 명분은 사회 정의 실현이었지만, 실제로는 호족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정치적 수술이었습니다. 대목왕후조차 만류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이 정책으로 수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었고, 이들은 세금을 내는 양민이 되어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광종은 이를 통해 "호족들아, 이제 너희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입니다.

과거제 도입, 새로운 시대를 열다

958년, 쌍기의 건의로 시작된 과거제는 고려 사회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더 이상 출신 성분이나 가문의 배경이 아닌, 순수한 실력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을 시험하는 제술과, 유교 경전을 평가하는 명경과, 그리고 법률·회계 등을 다루는 잡과까지 -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조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선발된 이들은 광종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그는 드디어 호족들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광종도 우연에 의존하지 않고 제도로써 미래를 설계했던 것입니다.

공포정치의 그림자, 칼바람이 몰아치다

개혁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광종은 960년경부터 본격적인 숙청에 나섰습니다. 호족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혈육까지도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갔죠. 이복 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 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그리고 이복 동생 효은태자까지 - 왕족들마저 그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 태자마저 의심하여 갈등을 빚을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옥이 항상 가득 차서 별도의 가옥을 만들어야 했고,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개혁 군주의 이면에는 이처럼 차가운 현실정치가의 모습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황제를 꿈꾸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다

광종은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대담한 선택을 했습니다.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광덕(光德)'과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