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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기를 만든 평양천도와 한성함락의 군주, "장수왕"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23.

 

장수왕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장수왕(長壽王), 거련(巨連) 또는 연(璉)
생몰: 394년 ~ 491년 (97세)
국적: 고구려
직업: 고구려 제20대 국왕
한 줄 요약: 78년간 재위하며 평양천도와 백제 한성 함락을 통해 고구려 최대 영토를 구축한 전성기의 황제

왕좌에 오른 18세, 아버지의 무게를 짊어지다

394년, 고구려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장차 아버지의 빛나는 유산을 이어받을 운명이었습니다. "체격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뜻과 기운이 호방하고 컸다"고 전해지는 거련, 훗날의 장수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412년, 겨우 18세의 나이에 위대한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왕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축복이자 짐이었습니다. 광개토왕이 정복한 광활한 영토, 그리고 그 영광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즉위 후 3년간 아버지의 상을 치르며 진정한 왕으로 성장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414년, 21세가 된 그는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며 자신만의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대담한 결단, 평양으로의 천도

젊은 장수왕이 내린 가장 큰 결단은 427년에 단행한 평양천도였습니다.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이 결정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미래를 건 혁명이었습니다.

국내성은 압록강변의 분지로,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농업 생산력과 교통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고구려 초기부터 뿌리내린 귀족 가문들의 근거지였기에, 강력한 집권을 추구하는 장수왕에게는 부담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반면 평양은 달랐습니다. 본래 낙랑군의 중심지로 문화적으로 선진적이었을 뿐 아니라, 큰 강과 평야가 있어 교류하기에 편리하고 왕권을 강화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남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완벽했습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수성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젊은 왕의 패기가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외교술의 달인, 중국을 상대한 등거리 외교

장수왕이 보여준 가장 탁월한 능력 중 하나는 외교술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혼란이 극심했는데, 그는 이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남조의 여러 왕조들과 북조의 북위에 모두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치는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것입니다.

435년 북연의 왕 풍홍이 북위에 쫓겨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했을 때도 그의 외교적 수완이 빛났습니다. 고구려군 수만은 위와 거의 동시에 연의 수도에 접근했고, 결국 고구려가 성을 장악해 풍홍과 다수의 주민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북위군도 고구려의 군세에 위압되어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수왕의 조공 외교는 결코 굴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공을 외교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면서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주체적이고 당당한 외교였습니다. 실제로 북위는 고구려의 조공을 특별하게 우대하여 472년에는 타국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조공을 할 수 있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려 도림과 한성 함락, 전략가의 면모

장수왕이 보여준 가장 극적인 승부수는 백제 정벌 작전이었습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조상들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작전은 치밀했습니다. 먼저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파견했습니다. 도림은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하여 신임을 얻게 되자, 왕에게 백제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천애의 요새이기는 하나 큰 성이 없어 외적의 침입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거대한 성곽의 공사를 진행시키면 누구도 백제를 넘보지 못할 것이라고 간언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아직 깨우침을 얻지 못하였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대왕께서 저를 백제의 첩자로 보내주신다면 왕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 도림

개로왕은 도림의 말에 따라 사성의 동쪽에서부터 숭산의 북쪽에 이르는 큰 성곽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공사로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도 곤궁에 빠지게 되자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475년, 드디어 장수왕이 움직였습니다.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때 장수왕은 82세의 고령임에도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습니다. 백제는 이 일격으로 수도를 잃고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최대 영토의 완성

장수왕의 정복 사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성을 함락시킨 후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아산만·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에 대해서도 468년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481년에는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시켜 미질부까지 진격했습니다. 충주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이 423년에 세운 것으로, 고구려의 남진이 얼마나 깊숙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98세까지 산 희대의 장수, 그 마지막 순간

장수왕은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는 정복 전쟁뿐 아니라 내치에도 힘썼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적으로 우호적으로 유지했습니다.

491년 12월, 장수왕은 9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북위는 그에게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는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이는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가장 높은 추증 중 하나로, 장수왕에 대한 북위의 높은 평가를 보여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유산, 고구려 전성기의 설계자

장수왕은 단순히 오래 산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광개토왕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완성시킨 전략가였습니다. 평양천도를 통한 남진 정책의 기반 구축, 치밀한 외교술을 통한 국제 관계 안정, 그리고 백제 정벌을 통한 한반도 패권 확립까지, 그의 모든 정책은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다했다" - 장수왕의 마지막 말

장수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완수했습니다. 그가 구축한 고구려의 전성기는 이후 100여 년간 이어졌고, 그의 평양천도 결정은 한반도사의 무게중심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긴 78년의 치세를 이끌어간, 진정한 제국의 황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