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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으로 동아시아를 감동시킨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

by 인물열차기관사 2025. 7. 30.

 

 

최치원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 최치원(崔致遠)

생몰: 857년 ~ 908년 이후

국적: 신라

직업: 학자, 문인, 관료

한 줄 요약: 동아시아 최초로 중국 문단의 인정을 받은 신라의 문장가이자, 한국 한문학의 아버지

12세에 당나라로 떠난 어린 유학생

857년 신라 경주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부모와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소년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각오가 담겨 있었을까요? 그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부처의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품고 당나라로 떠났습니다. 이 결연한 의지는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불굴의 정신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신라 청년들에게 당나라 유학은 출세의 지름길이자 동시에 험난한 도전이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당나라 수재들과 경쟁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빈공과 급제와 황소의 난 격문

유학 6년 만인 874년, 18세의 최치원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단순히 과거에 합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당나라 관리로서 여러 지방에서 근무하며 뛰어난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고, 특히 문장가로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가 쓴 격문은 당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신라 사람의 붓끝이 만 명의 군사보다 날카롭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가 중국 문단의 중심에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6두품의 한계와 상서문의 좌절

당나라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둔 최치원이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885년, 28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신라 조정에서 아찬의 관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맞이한 현실은 그가 꿈꾸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진골 출신이 아닌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 때문에 뜻을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진성여왕에게 올린 상서문에서 당시의 사회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과 무관심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계원필경 완성과 해인사 은둔

현실 정치에서 좌절을 맛본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은둔의 길을 택했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오가며 보낸 말년의 시간은 그에게 또 다른 창조의 시기였습니다.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보낸 이 시기에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완성해갔습니다.

"계원필경"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당나라에서 익힌 고전적인 한문학 기법에 신라인으로서의 정서와 체험을 융합한 독창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제가야산독서당"에서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은, 단순히 중국 문학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선 주체적인 문학 의식을 보여줍니다.

신당서 등재와 한문학의 개척

최치원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신라와 당나라라는 두 문화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신라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며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정사인 "신당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의 문학적 성취가 국경을 넘어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가 남긴 "계원필경" 20권은 신라인이 쓴 최초의 본격적인 한문학 작품집으로, 후대 한국 한문학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해동공자로 추앙받는 문학의 조종

최치원이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문학적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그를 "해동공자"라 부르며 존경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는 한국 한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정신입니다. 이국땅에서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낸 문화적 자존심,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개혁 의지, 그리고 은둔 속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예술혼. 진정한 문화적 주체성이란 남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자신만의 색깔로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